두 비트 사이의 틈
Between Two Beats

2022.7.21. - 8.10.
금천예술공장 3층, PS333

인터뷰

인터뷰 진행 및 편집/임현영


(1) 서재정


Q. <두 비트 사이의 틈> 전시 기획에서 가장 주목했던 지점과, 그것이 기존의 작업과 어떤 연결점을 지니고 있는지 설명해주면 좋겠다.

서: 이번 전시에서는 도시에 대해 공간적 구조로 접근하였다. 기존의 작업은 건축 모티브를 통해 심리적 공간을 표현하는 것으로 작품 속 공간은 현실과 비현실, 2차원과 3차원의 경계에 있는 상상 속 구조라고 할 수 있다. 현실 공간의 경험에서 출발하기는 하지만 작품 속 공간은 비현실적이고, 3차원의 공간을 회화라는 2차원으로 치환하지만 그 매체가 다시 3차원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그렇다. 나는 전시 제목에 등장하는 ‘틈’을 이러한 개념과 연결시키고자 했고, 건축적 구조를 통해서 눈에 보이지 않는 ‘사이의 공간’을 리듬적 구성과 기하학적인 형태로 형상화했다. 건축공간은 가시적이지만 우리는 그 공간을 통해 눈에 보이지 않는 틈을 경험할 수 있다는 점에 착안한 것이다. 나는 이를 심리적인 작용의 한 부분으로 보았고, 이를 도형 같기는 하지만 명확한 도형은 아닌 추상적인 형태로 표현했다.

Q. 초창기부터 ‘건축적 심리공간’을 주제로 작업해왔는데, 이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서: ‘건축적 심리공간’이라는 표현은 현실 속 또 하나의 공간이라고 할 수 있는 건축공간의 경험에서 비롯되었다. 계단, 기둥, 아치와 같은 건축공간의 기본적인 구조들은 하나의 단위처럼 작동하며 동일한 모습으로 다른 장소에서도 반복되곤 한다. 나는 이를 공간과 또 다른 공간을 잇는 상상의 매개체로 보았고, 이를 통해 또 다른 공간으로 이동하는 것과 같은 시지각적 연상을 하게 되었다. 초창기에는 기억 속 장소를 떠올렸다가 그것이 점차 건축적 장소로 좁혀졌고, 현재는 현실에서 경험하는 다양한 건축적 공간과 심리적 공간을 합친 ‘건축적 심리공간’을 작업 전반을 아우르는 조형언어로 사용하고 있다. 나의 작업은 하나의 선에서 시작되기도 하며, 퍼즐 조각처럼 공간의 구조들을 해체하고 재조합하기도 한다. 어느 방법이건, 이는 현실의 공간을 상상을 통해 새롭게 재편성한 것으로 화면에 드러나는 것은 익숙함과 낯섦이 뒤섞인 공간이 된다.

Q. 작업을 보면 그린, 블루 모노톤 계열의 색조가 눈에 띈다. 이러한 색조가 작업에 빈번히 등장하게 된 이유가 궁금하다.

서: 모노톤을 사용하게 된 이유는 마치 흑백 사진처럼 시간이 지난 장소를 다시 반추하는 작용에서 비롯되었다. 색을 통해 과거의 것들이 뒤섞인 느낌을 내고 싶었다. 그런 점에서 그린, 블루는 작가에게서 나오는 심리적 색채라고 할 수 있다. 구도를 상상하면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색들이다. 한편, 그린, 블루 계열 색채를 가리켜 흔히 쿨톤이라고 하는데, 나의 작업 안에서 그린과 블루는 온화한 느낌을 준다는 이야기를 듣기도 한다. 그래서 낯설고도 익숙한 정서, 혹은 불특정한 시공간에 관한 노스텔지어를 불러일으키는 역할을 한다고 생각한다. 결과적으로, 구조적이고 기하학적인 측면에도 불구하고 작업의 평면이 차갑고 딱딱하게만 느껴지지는 않게 된다. 이번 작업의 경우 캔버스를 크게 3면으로 분할하고, 그 중 2면은 동일한 컬러, 1면은 다른 계열의 컬러로 배분했다. 이러한 컬러 분배로 인해 면끼리 맞닿는 선이 튀어나와 보이기도 하고, 안쪽으로 수렴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Q. 지난번 예술의 시간 토크에서 ‘사고의 틈’, 또는 ‘양면적인 속성들의 틈’을 구현하는 작업을 한다고 했었다. 현실과 비현실, 2차원과 3차원, 완전성과 불완전성 같은 상반된 개념의 경계에 위치하는 작업이라고 덧붙였던 것도 기억이 난다. 다르게 해석하자면, 수학적으로 완벽해 보이는 공간 너머 우리가 알지 못하는 새로운 규칙들이 존재하고 있고 그것들이 ‘틈’을 통해 조금씩 모습을 드러낸다고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서: 작업에 있어 ‘경계, 사이’라는 의미에서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하나로 규정되지 않는 공간을 생각하였다. 작업 제목인 ‘불확정성 유기적 공간’은 이런 의미에서 구조에 있어서 하나의 소실점으로 귀결되지 않는 가변적인 형태를 의미하기도 한다. 완결되지 않았다는 뜻의 제목 자체가 이번 전시의 주요한 개념이었던 ‘틈’을 떠올리게 하는 지점이 있다고 생각했다. 특히 이번 전시에서는 관람자들이 작업을 고정해두지 않고 보기를 바랐다. 예를 들어, 전시에 선보인 세 점의 캔버스는 모두 150x125cm 동일한 크기의 사각형에서 출발하지만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갈수록 깎이는 면적이 커진다. 이것은 마치 기하학적 형태의 순환처럼 보이며, 이 때문에 캔버스의 위아래, 그리고 좌우의 분별은 불필요해진다. 또 2차원의 캔버스를 유심히 들여다보면 면 너머로 선으로 구성된 3차원 입방체가 눈에 들어온다. 입방체 안에서 전혀 다른 또 하나의 입방체가 생성되는 것이다. 이처럼 나의 작업은 보는 이에 따라 다르게 감각되고, 양가적인 개념이 한데 존재하는 것이기도 하다.

Q. 찾아본 바로는 쉐이프트 캔버스(shaped canvas)를 사용한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비정형의 캔버스를 사용함으로써 그림을 바라보는 각도에서 다른 장면이 포착되는데, 이것이 조각 혹은 건축과 유사하다는 생각을 했다. 한편, 쉐이프트 캔버스를 활용한 작업의 과정이 궁금하다. 최근에는 형태 하나를 떠올린 다음 소실점을 내부에 만드는, 그래서 안으로 수렴되게끔 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고 들었다. 그렇다면 캔버스 형태를 먼저 정하고 그에 맞는 도면이 만들어지는 것인가?

서: 이전 작업이 단일 구조 또는 부분적인 형태들을 재조합하면서 확장되는 형태였다면, 최근 작업은 변형된 육면체의 모티브에서 시작된다. 건축공간을 경험하는 과정에 있어서 고정된 형상의 인식에 그치지 않고 공간 속에 또 다른 공간을 새롭게 상상하고 만들어내는 것처럼, 육면체 형태가 변형되면서 비슷하지만 다르게 끊임없이 변주될 수 있는 공간 형태를 드러내고자 하였다. 또, 이전 작업은 밖으로 확장하면서 만들어지는 불규칙한 형태가 두드러진다면, 최근 작업들은 전체적으로 비정형 입방체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작업 과정은 실제 크기의 5분의 1 스케일로 도면을 그리면서 형태를 확정하고 이를 바탕으로 캔버스를 제작한다. 에스키스 작업을 하듯이 여러 시안 중에 골라서 정교하게 도면으로 발전시키고 그 크기를 다시 키우는 것이다. 눈앞에 보이는 공간에서 여러 이미지를 상상한 다음, 육면체라는 기본 형태를 규칙으로 잡고 이를 계속 변형시키는 것이 최근 작업의 방식이다. 육면체는 사각형이 모여 만들어졌고, 이 사각형은 선이 모여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나는 육면체를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무한한 형태라고 생각한다. 한편, 초창기 작업은 아웃라인이 균일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작업을 하면서 경계가 계속해서 추가되거나 변형되었기 때문이다. 요즘에는 틀을 먼저 잡아놓고 안으로 수렴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Q. 전시 <두 비트 사이의 틈>은 몸을 통해 감지되는 도시의 리듬, 그리고 그것의 물질성에 초점을 맞춘 전시였다. 도시는 무수히 많은 건축 유닛들이 모여 만들어진 하나의 거대한 구조물이라고 할 수 있을 것도 같다. 평소 주목했었던 도시의 장소가 있는가? 그렇다면 그 곳의 리듬은 어떠한가?

서: 나는 다양한 건축적 공간을 탐방하는 것을 좋아한다. 건축물의 외관이나 랜드스케이프 같은 거시적 공간을 하나의 기념비적 형태 또는 건축적 풍경으로 바라보는 것에서 시작하여 점차 건축물의 내부에서의 몸이 체험하는 감각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다. 예를 들어 무수히 많은 계단이나 기둥 구조는 시각적으로는 견고하고 고정된 형태이지만, 그 요소들이 다시 재조합되는 상상 속 공간을 떠올릴 수 있다. 계단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심리적으로 서로 다른 공간이 오버랩 되는 것이다. 나는 이처럼 시작과 끝이 모호한, 계속 변화하는 상상적 공간의 구조에서 느껴지는 심리적 반응들을 탐구한다. 작업의 제목 ‘불확정성 유기적 공간’처럼 견고한 형상들의 유기적인 흐름, 규칙적이면서도 불규칙한 리듬이라고 할 수 있겠다.

Q. 이번 전시에서 선보인 ‘불확정성 유기적 공간’(2022)은 이러한 기본 요소들마저 사라지고 오로지 선과 면의 조합으로만 이루어졌는데, 특별한 이유가 있는가?

서: 특별한 이유가 있었다기보다는, 작업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추상으로의 전환이 이루어졌다고 본다. 나는 서로 다른 공간의 부분적인 형태들을 퍼즐 조각처럼 맞추면서 하나의 구조로 만들거나, 하나의 이미지를 분할하여 소실점 등이 맞지 않는 새로운 공간 구조로 조합하기도 한다. 이번 작업에서는 세부적인 구조들의 조합의 방식과는 조금 다르게 비정형 입방체로서의 전체적인 형태에 먼저 중점을 두었고, 이러한 불가능한 비정형의 입방체들이 레이어처럼 무한히 겹쳐져 있는 구조를 형상화하였다. 이러한 상상 속 구조는 비어있는 것 같지만 그림에 가까이 갈수록 뚜렷하게 보이는 선적인 요소들의 구성처럼 무한한 요소들을 담을 수 있는 공간이다. 선으로 채색된 부분들은 어떤 시선에서 보면 비가시적인 구조라고도 할 수 있다. 이번 전시의 작업 ‘불확정성 유기적 공간 13’(2022), ‘불확정성 유기적 공간 14’(2022), ‘불확정성 유기적 공간 15’(2022)에서는 각각 독립적이면서도 유사한 비정형 형태들이 변화하며 순환하는 구조처럼 보이고자 하였다. 정해진 그림의 순서가 있는 것은 아니며 변화하는 생각의 불완전한 형태들이라고 할 수 있다.

Q. ‘불확정성 유기적 공간’(2022) 이후 작업 계획은 어떻게 되는가? 이후 행보를 내딛기 전, 현재 가장 주목하고 있는 주제도 궁금하다.

서: 2차원과 3차원, 현실과 비현실 등과 같은 상반된 개념들을 함께 다루는 것에 계속 관심을 가지고 있다. 여기에 ‘공간’이라는 개념에서 비움과 채움의 불완전한 구조에 대한 생각을 발전시키고자 한다. 또한 회화를 주된 매체로 하면서도 예전부터 조금씩 시도했던 입체와 설치로서의 표현 방식에 꾸준히 관심을 가지고 있다. 쉐이프트 캔버스(shaped canvas) 작업이 구현된 과정처럼 앞으로 작업에서 다루고 있는 공간, 2차원과 3차원의 개념을 매체적인 실험을 통해서도 확장하고자 한다.


(2) 안광휘


Q. <두 비트 사이의 틈>은 도시의 리듬, 더 자세히 말하자면 도시라는 장소와 시간, 그리고 에너지의 상호작용에 초점을 맞춘 전시였다. 도시의 어떤 측면에 관심을 가졌으며, 이번 전시에서 그것을 어떻게 풀어냈는지 궁금하다

안: 고윤정 기획자님으로부터 주기의 앞과 뒤의 차이가 생기며 도시의 이야기들이 발생한다는 것을 들었던 일이 생각난다. 도시가 ‘주기’를 가지고 있으며, 그 주기대로 만들어지고 소멸되는 현상이 일종의 리듬으로 보일 수 있다는 지점에서 기획에 크게 공감할 수 있었다. 힙합 음악에서 라임(rhyme)은 같은 소리를 반복해서 박자에 맞춰 뱉으면서 만들어지는 리듬을 의미하는데, 그것이 긴 이야기를 전달하기 위한 규칙이라는 점에서, 또 같은 소리가 반복되지만 같은 의미가 반복되는 것은 아니라는 지점에서 전시의 주제와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힙합에 기반한 기존 작업을 기획에 연결시켜볼 방법을 고민했고, 벌스(verse)의 전체적인 구조는 동일한 랩 두 개를 만들고 이 둘 사이에 가사 차이를 두면 어떨까하는 생각에 이르렀다. 소리로만 들었을 때는 유사하지만 다른 내용을 전달해보자는 것이었다. 첫 번째 벌스에는 처음에 음악을 만들면서 했었던 생각들을 담고 두 번째 벌스에는 미술을 하는 사람으로서 지금 하는 생각을 담았다. 고로 두 랩 간의 약 15년이라는 시간적 간격이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15년 전의 나와, 15년 후 지금의 나는 같은 도시에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공통점이 있지만, 과거와 지금의 나를 둘러싼 풍경은 분명 대조된다. 아마 이것은 예술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기 때문이지 않을까 싶은데, 예전에는 ‘잘 할 수 있다’는 다짐이 우선이었다면 현재는 ‘잘 하고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 먼저 들기 때문이다. 전시에 출품한 ‘렌티큘러’(2022) 작업을 통해 이 같은 상태를 충돌시켜보고 싶었다.

Q. 힙합 음악이 탄생하던 당시의 맥락을 작업에 적용하여 작가, 작품, 전시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시한다. 힙합의 방법론이 작업에 구체적으로 어떻게 적용되는지, 힙합의 어떠한 측면에 주목하는지에 대해 더 자세히 들어보고 싶다.

안: 우선 힙합의 기원에 대해 간단하게 언급을 해야겠다. 힙합 자체는 1970년대부터 나온 것이라 역사가 굉장히 짧다. 70년대 말 사우스 브롱스에 도심과 외곽을 잇는 고속도로가 생겼는데, 이 일로 인해 굉장히 많은 가구가 철거되고 거의 6만에 가까운 인구가 삶의 터전을 옮겼다. 그러나 이곳을 떠나지 못한 몇몇 흑인 빈민들은 생존을 위해 공동체를 형성하였는데, 음악은 이들이 유대감을 형성하게 하는 가장 큰 요인이 되었다. 두 대의 턴테이블에 각각 레코드 기계를 놓고, 서로 다른 곡을 재생한 다음 각 곡의 브레이크 부분(1절이 끝나고 2절이 나오기 전 간주 부분)을 계속해서 트는 것이 힙합 비트의 원시적인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완성된 음악의 비트 위에 자기소개를 하거나 즉흥적으로 말을 얹었는데, 이 때 호응을 이끌어내기 위한 장치로 사용된 것이 라임(rhyme)이라는 운율적 장치이다. 또, 셋업(set-up)이나 펀치라인(punch line)등의 효과가 가미되면서 랩이라는 새로운 장르가 탄생하게 되었다. 이처럼 같이 리듬을 타면서 음악을 듣고, 몸을 맡기고 같이 호흡하는 모든 행위가 흑인을 비롯한 브롱스 지역의 유색인종을 하나의 집단으로 만들어주었다.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여러 지점에서 나는 힙합과 전시의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었는데, 첫 번째는 행사가 진행되는 장소와 방식이다. DJ들이 유휴공간을 일시적으로 점유해 사람들을 초대하고 파티를 열었던 것처럼, 전시 역시 빈 공간을 잠시 점유하고 작가가 호스트가 되어 행사를 연다. 두 번째로는 이 행사가 가지는 정치적인 성격이다. 유색인종들은 주류인 백인사회에서 사회적으로 고립된 이들이었으나 힙합이라는 음악 스타일을 통해 이들의 정체성을 드러내며 정치적인 힘을 가지게 되었다. 나는 내 작업 역시 미술계 내의 사람들을 모이게 하고, 이들에게 생각할 만한 논쟁거리를 던지는 역할을 수행하기를 바란다. 이것은 ‘왜 음악이 아닌 미술의 맥락에서 힙합을 기반으로 한 작업을 보여주는지’에 대한 나름의 답변이기도 하다. 사실 전시를 진행하면서 적지 않은 공적 기금이 투입되는 것에 반해 너무 적은 수의 사람들-미술인에 한정된-만 즐길 수 있는 것이 아닌지 의문이 들 때도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나의 작업, 혹은 전시가 내 자신이 겪는 문제가 나만의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고, 개인에 머무르던 생각을 조금 더 큰 단위의 운동으로 변화시켜주는 역할만 해도 의미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Q. 작업 뿐 아니라 기획, 비평 등 미술계 내에서의 다양한 포지션을 경험해왔다, 이러한 경험들이 작업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궁금하다. 덧붙이자면, 작업, 기획, 비평은 각기 다른 직무들이지만, ‘창작행위’라는 공통범주로 묶일 수 있는데, 그렇기 때문에 각각의 고민과 문제들이 유사한 부분이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미술인으로서의 다양한 아이덴티티를 경험하면서 인식한 문제점들이 궁금하다.

안: 공통적으로 인식한 문제보다도, 모든 일을 할 때 기본적으로 지니고 있는 문제의식이 있다. 이미지가 생산, 소비, 유통되는 방식이 달라졌고. 작가와 관객의 역할, 기능도 달라진 상태에서 작가라는 생산자가 전문적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가라는 생각이다. 즉, 생산자, 소비자의 경계가 거의 무너진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작가가 이미지의 생산자로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 계속 고민한다. 기획을 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작품이 대중에게 보여지는 방식이 기존 관행과 달라질 수 있는 지점을 찾고 싶다. 나는 대학원에서 판화를 전공했는데 판화가 사양산업이 된 까닭은 그것의 고유한 가치를 주장하기보다 기존에 전통적인 매체들이 가치를 주장하던 방식을 답습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판화의 복제가능성을 애써 부인하고 마치 회화와 비슷하게 보이기 위해 에디션에 희소성을 강제로 부여하는 것 같은 경우 말이다. 이렇게 되면 판화는 회화의 아류를 면치 못하게 된다. 판화를 예시로 들었지만 나는 무한복제가 가능해진 디지털 환경에서 작품이 전시, 생산, 유통되는 방식 역시 변화되어야 하지 않나 하고 생각하며, 전면적으로 드러나지 않아도 이러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작업을 한다. 동시대의 누구라도 크고 작게 이미지의 생산과 유통에 참여를 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작가가 할 수 있는 일은 방향성을 제시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구시대적인 제도 안에서 생기는 모순들을 지적하고, 현재의 상황에서 새로운 방식이나 가치를 찾아내야 한다.

Q. <두 비트 사이의 틈>에서 선보인 ‘렌티큘러’(2022)라는 작업은 각기 다른 색깔의 레이어가 화면에 반복적으로 등장하지만, 텍스트 이외에 특정한 이미지를 사용하지는 않았다. 이번 작업에서 가사로만 화면을 구성한 의도가 무엇인지 궁금하다.

안: 하나의 비트를 공유하는 벌스(verse) 두 개를 텍스트로 오버랩 시켜 설치했다. 이렇게 되면 관객이 글씨들의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서 능동적으로 개입해야 한다. 벌스 각각을 텍스트를 통해 직접적으로 전달할 때보다 더 적극적이 되어야 랩의 의미를 알아차릴 수 있다는 뜻이다. 대화할 때와는 또 다르게, 렌티큘러 작업을 더 적극적으로 들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그렇게 했다. 화면 텍스트 뿐만 아니라 사운드도 겹쳐 들리기 때문에 각 벌스를 또렷이 들으려면 왼쪽, 혹은 오른쪽으로 몸을 이동해야 한다. 이 과정 안에서 관객들의 참여를 유도하고자 했고, 실제로 그렇게 움직이다보면 화면에 벌스 하나의 가사만 노출된다. 결국, 하나의 틀 안에서 서 있는 지점에 따라 다른 가사를 보고, 듣게 되는 것이다.

Q. ‘렌티큘러’(2022)가 미술 일을 지속하며 겪는 어려움을 이야기하고는 있지만, 마냥 그 문제를 너무 무겁게 느끼지 않게 만든다고 생각했다. 힙합에 기반을 둔 작품의 특성상 운동감, 리듬감에서 발현되는 일종의 ‘흥’이 있기 때문인 것 같다. 이처럼 문제의식은 깊이 내버려 둔 채, 작업 자체를 ‘가볍게’ 만드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나아가, 관람자들이 작업을 어떻게 인식하기를 바라는지도 궁금하다.

안: 힙합 음악 자체가 파티 음악에서 시작했다. 말하자면 힙합 음악의 뿌리에 펑크함(funk)이 있는 것 같다. 미국에서도 젊은 래퍼와 윗세대 래퍼들 사이에 디스전이 벌어질 때면, 후자가 전자에게 자주 하는 얘기가 ‘전혀 펑크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처럼 힙합은 디스코 음악을 베이스로하고 있기 때문에 펑크한 비트들이 많다. 일단 신나야 한다는 것이 기본적으로 깔려있고, 스스로도 거기에 동의하는 편이다. 따라서 너무 끈적하거나 딥(deep)한 비트는 지양하고 있다. 재미가 있고, 첫 마디가 나오면 바로 비트에 호응할 수 있는 음악을 만든다. 이번 작업의 경우에는 BPM을 95 정도로 설정했는데, 개인적으로는 이 템포가 적당히 흥겹고, 그루브를 형성하기 좋은 것 같다.

Q. ‘렌티큘러’(2022) 이후 다음 작업 계획은 어떻게 되는가? 개인전을 할 시기가 다가오는 것 같기도 하다.

안: 처음 개인전을 한 게 2017년이고, 이후로 1-2년마다 개인전을 했던 것 같다. 개인전은 래퍼로 치자면 앨범을 내는 것과 같은데, 보통 앨범은 1집이 명반이지 않은가. 그 이유는 아마 1집은 개인이 평생 동안 쌓아온 이야기들이 누적된 산물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고 나면, 2집부터는 퀄리티가 차차 떨어지고, 나중에는 자신만의 레이블을 차려서 후배를 양성하게 된다. 나도 그런 노선을 따라가려고 생각 중이다. 2017년 인스턴트루프에서 있었던 첫 개인전 때는 ‘방구석 MC’ 컨셉으로 가사집을 보면서 음악 듣던 어린 시절을 모방했다면, 2019년 사루비아에서 있었던 두 번째 개인전 때는 언더그라운드 공연장 한국에 있었던 마스터플랜이라는 곳의 상연 방식을 따라해 보려고 했었다. 그리고 그 다음이 디스위켄드룸에서 있었던 세 번째 개인전이다. 화이트큐브의 정돈된 공간에서 가장 최근의 개인전을 한 셈이다. 그 이후 활동 방향을 계속 고민했고, 최근 정체성을 여러 갈래로 쪼개서 미술 작업과 더불어 음악, 기획 등 다양한 활동을 느슨하게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마치 하나의 레이블 아래 다양한 크루들이 존재하는 것처럼, 나라는 개인이 다중의 정체성을 가지고 여러 방면으로 활발히 활동하고 싶다.


(3) 조재영


Q: 2020년에 아뜰리에 에르메스에서 있었던 <다른 곳> 전시를 관람했는데, <두 비트 사이의 틈> 전시를 보면서 가장 먼저 떠올랐던 것이 당시 선보였던 ‘허공의 단면들(2020)’이라는 작업이다. 규칙적으로 배열된 조각들 사이로 걸어 다니다 보면 개별 다면체들 간의 미세한 차이가 보이기도 하고, 또 관람자의 위치에 따라 조각의 형태가 달리 보이기도 했었다. 이번 전시에서 선보인 ‘Monster&Monsters’(2022) 역시 이러한 가변성, 그리고 관람자의 지각적 체험을 염두에 두고 제작했다고 들었다.

조: <다른 곳> 전시 때는 공간이 가지고 있는 물리적인 특성보다도 전시장 안에서 조각들이 공간을 어떻게 채우며 구성할 것인지를 먼저 고려했다. 또, 공간 사이를 다니게 되는 관객들을 떠올리며 그들이 공간 사이사이를 지나다니며 무엇을 감각할 수 있는지를 생각하게 되었다. 내 조각은 단순히 시각적으로 보여지는 물리적인 대상이 아니라 그 안에서 함께 부딪히며 개입되는 신체 속에서 의미가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이는 최근에 참여했던 <두 비트 사이의 틈> 전시와도 맞닿아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Monster&Monsters’(2022) 역시 보는 위치에 따라 지각되는 형태가 달라지고, 나라는 주체와 타자 사이를 연결하거나 막아버리는 구조물들의 위치 설정에 따라 내가 타인을 인식하는 범주가 달라진다. 주체도 움직이고, 타자도 움직이는 상황 속에서는 그 무엇도 단번에 파악되거나 총체적으로 읽히지 않는다. 이처럼 공간 속에 유입되는 신체를 통해 자아와 타아의 위치를 상대적으로 규정하고, 심지어는 해체하는 것이 작품의 의도라고 할 수 있다. 결국 나의 조각은 기존에 없던 공간을 만드는 행위이다. 인간이 줄곧 머물러왔던 공간(학교, 직장, 공공장소와 같은)이 그들을 규정짓거나 모종의 제약을 부과하는 곳이라면, 내가 만드는 공간은 이러한 제약이 사라진 곳이다. 그리고 이러한 조건 속에서 스스로를 어떻게 재배치시켜야 하는지를 계속해서 고민하고 있다.

Q: 예술의 시간에서 있었던 토크 때 ‘조각의 영역 내에서’ 또는 ‘조각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으면서 기존의 위계질서나 기존 조각이 갖는 원본성, 영원성에 도전’한다고 이야기했던 것이 기억난다. 이처럼 조각이라는 영역의 경계에서 그 안팎으로 매체 실험을 진행하는 행위 자체가, 넓은 의미에서는 긴장의 지속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한 작업에서 조각의 삼차원적 양감과 2차원적 평면의 효과가 교차하는 지점이 그러하다. 이러한 ‘긴장’, 또는 경계 탐구와 관련해 이야기를 더 나눠보고 싶다.

조: 내가 이야기하는 ‘조각의 영역’이란 최근 ‘조각이 무엇이냐’를 기반으로 형성된 조각의 범주와는 조금 다르다. 조각에 경계가 있다고 하려면 그 경계가 무엇이냐는 질문이 선행되어야 하는데, 그 경계를 하나로 정의하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나에게 조각의 영역은 조각의 한계성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것으로, 그것은 물성을 시공간 속에 포지셔닝하는 과정 중에 생겨난다. 개인이 사유하는 비물질적인 것을 물질로서 구현하는 것이 내가 생각하는 조각이고, 추상적인 사유를 물질화 했을 때, 즉 무한히 발산하는 개념들을 하나의 물성으로 축소시켰을 때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왜곡이 조각의 한계이다. 예를 들어, ‘사랑’에 대한 정의는 무한히 존재할 수 있지만, 그것을 조각이라는 물질로 드러내는 순간 소수의 정의만 남게 되지 않나. 이처럼 기본적인 한계성 위에서 조각을 한다는 의미로 조각의 경계에서 작업을 한다고 언급했던 것이다. 조각은 이러한 한계에 대한 투쟁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물질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행위 자체에 매력을 느끼며, 시공간 속에 물성을 구현하는 일에 여전히 관심이 많다.

Q: 방금 언급한 ‘물성’이라는 것은 현실성을 지극히 반영한다. 조각가가 처해 있는 환경과 그의 신체, 심리적 조건이 조각에 고스란히 반영된다는 점에서 매력을 느끼는 것이라고 보아도 되겠는가.

조: 그렇다. 작업을 하다보면 개인에 관한 아주 미시적인 것부터 거시적인 것까지 조각에 전부 반영됨을 실감한다. 신체적인 컨디션이 기분에 미치는 영향과 그 기분이 다시 작업에 미치는 영향 같은 것들 말이다. 이처럼 실제의 삶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이 예술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예술을 현실을 아주 벗어나서 존재하는 초월적인 것이 아니라 현실의 삶, 그리고 사회적 맥락과 함께 연동해야 한다는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 그래서 현재 내가 할 수 있는 이야기들을 작업을 통해 솔직하게 풀어내고 싶은 마음이 크다. 여기에 하나 더 덧붙이자면, 예술이라는 것은 결과물 뿐만 아니라 이를 만드는 과정, 그리고 이를 보는 사람들의 사유를 아우르는 입체적인 관계 안에서 그 의미가 형성된다고 생각한다. 조각을 통해 발생하는 입체적인 의미 안에 조각이 위치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조각가의 상황과 더불어 조각이 자리하는 사회적 관계망이라는 현실을 함께 고려하고 있다.

Q: 2021년 온수공간에서 진행되었던 개인전 <보디 그라운드>에서부터 최근 있었던 하이트 컬렉션 <각>에서도 신체를 소재로 한 작업들을 선보였다. 이번 작업인 ‘Monster&Monsters’(2022)도 신체의 부분들을 조각에 대입해 볼 수 있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는가?

조: <보디 그라운드>의 경우 ‘나’라는 개인이 존재하고 그것이 확장된 것을 집단이라고 했을 때, 스스로가 집단들 속에서 파도치고 있다는 느낌으로부터 출발했다. 직접적으로 말하자면 집단 속에서 다양한 개인들이 공존하지 못하고 있는, 집단 속에서 개인이 획일화 되어버리는 상황에 문제의식을 느꼈다. 집단이 마치 하나의 거대한 시체처럼 보이기도 했다. <보디 그라운드>에는 이처럼 내가 속한 집단을 보며 느끼는 정리되지 않는 모호한 기분이 반영되었다. 신체 조각이라고 하기에는 큰 규모의 조각이 설치되었는데, 그것은 신체이지만 공간을 담고 있는 확장된 신체, 즉 오히려 확장된 집단에 가까운 것이었다. 이처럼 당시에는 조각을 통해 개별 신체보다는 공간화/집단화 된 신체를 구현하고자 했다. 다양한 개인이 생동하는 집단이 아니라 하나의 집적물로서 신체가 되어버린 집단, 그리고 또 하나의 신체가 공간으로 확장된 그 중간의 상태라고 볼 수 있겠다. 그리고 온수공간에서 처음으로 거울을 재료로 사용하게 되었는데, 거울은 대상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나는 대형거울이 아닌 소형 거울을 사용하여 대상을 다 담을 수 없었고, 이로써 도리어 파편성을 강조하였다. 우리가 조각에서 인지하는 것은 물성이기도 하지만 이미지이기도 하고, 또 이러한 이미지의 과잉은 실재와 가상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든다. 이러한 모호성을 파편화된 이미지로 가중시키고자 했고, 실재와 비실재의 영역을 함께 다루고 싶기도 했다. 몬스터 시리즈에 이를 적용시켜본다면, 초기에는 결과적으로 큰 덩어리를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작업이 이루어졌다면, <다른 곳>에서부터 시작해서 <보디 그라운드>, <각>, <두 비트 사이의 틈>에서는 덩어리가 분해되거나 파편화되는 지점이 더 적극적으로 등장한다. ‘Monster&Monsters’(2022)는 이러한 맥락에서 가변적이고 파편화된 신체를 드러내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Q. 인터뷰 리서치를 하면서 가장 많이 접할 수 있었던 키워드가 ‘껍데기’ 또는 ‘껍질’이었다. 흔히 껍데기라고 하면 단순히 ‘속이 비어있는’ 특성만 생각하게 되는데, 조재영의 작업에 적용되는 ‘껍데기’는 다양한 의미를 갖고 있는 것 같다. 특히, 이 ‘껍질 작업’에 관한 유진상 교수의 평론『겹쳐진 시간의 장소들』에서 발견한 ‘껍질들은 연사를 만들어냄과 동시에 그 자체로 체계를 이룬다’는 말이 인상적이었다. 껍질이 결정화되며 안으로 수렴하기도 하지만 관계를 이루며 외부로 확장해 나가기도 한다는 뜻으로 이해했는데, 이 ‘껍질’로 공유되는 관계성에 대해 묻고 싶다.

조: 우선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에서 출발해야 할 것 같다. 학부 때 배웠던 조각 중 일부는 굉장히 무거운 재료들을 사용해야만 가능했다. 돌이나 철 같은 것들 말이다. 이러한 재료를 다루는 이유를 질문했을 때 돌아오는 답변은 그것이 지닌 영구성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부식되거나 낡지 않는, 한 번 만들어지면 영원히 존재할 수 있는 작업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 그러나 나에게는 ‘영원하지 않은 조각’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항상 있었다. 이는 당시 정체성에 대한 고민과 맞물리기도 했다. 스스로를 어떻게 정의해야 하는지 잘 모르겠던 시기의 의문들이 영원성을 고수하는 기존 조각계의 태도에 대한 의문으로 이어졌고, 그것이 지닌 ‘이것만은 유일하다’는 통념을 타파하고 싶었다. 그러한 의미에서 껍데기는 영원성, 순수성, 유일성, 원본성에 상반되는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껍데기는 점점 증식해서 커지지만 안은 텅 비어있다. 즉 고정된 알맹이가 부재한다는 뜻이다. 물론 이 껍데기를 원본과 아예 분리해서 생각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껍데기는 원래의 형태를 벗어나 계속해서 변화한다. 원본과 껍데기 사이에는 의미의 변화가 아닌 미세한 수치적 차이만이 존재하며, 이러한 차이는 전자와 후자의 동일성을 의심케 하는 역할을 한다. 미세한 차이만으로 증식과 변화를 지속하다보니 작가인 나조차도 껍데기의 구조와 형태를 기억하거나 그릴 수 없을 때가 많은데, 이는 오히려 작업이 나의 의도에 맞게 전개되었음을 입증해 주는 것이다.

Q: 주관적인 판단일 수 있지만 조각의 외관만 바라보았을 때는 치밀하고 조직적인, 차가운 조각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 차가운 중립성이 감각 경험을 넘어서 심리적인 부분까지도 건드린다고 생각하는데, 이러한 방법을 선택한 특별한 이유가 있는가?

조: 직전 질문과도 연결해서 생각해볼 수 있는데, 나는 특정한 의도에 의해 규정되지 않는 조각에 관심이 있다. 따라서 내 조각을 보았을 때 명상을 할 때와 마찬가지로 의미나 판단을 비워낸, 즉 사고나 생각 이전의 상태를 경험하게끔 만들고 싶었다. 내 조각이 차갑고 중립적으로 보이는 이유는 그것을 이루는 기하학적인 형태들에 기인한다. 또, 이렇게 조각의 수학적 측면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숫자의 중립성 때문이다. 우리가 어떤 대상을 언어적으로 풀어냈을 때는 그것에 판단이나 기대, 평가가 담기기 마련이다. 이러한 평가는 대상의 성질을 고착화하고 편견을 형성하기도 한다. 나는 이를 벗어나 평가를 유보하는, 나아가 호오가 존재하지 않는 중립적인 조각을 만들기를 원했다. 언어와 달리, 우리가 무언가를 숫자로 나타냈을 때는 개별 요소 간의 수치적 차이만 존재하게 된다. 물론 수적 체계 역시 완전히 중립적이라고 보기는 어려울 수 있겠지만 언어와 비교했을 때 상대적으로 주관성을 덜 반영한다고 생각했고, 그렇기 때문에 조각을 이루는 유닛들을 수치적으로 미세하게 뒤트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4) 박윤주


Q. <두 비트 사이의 틈>은 도시의 모습과 각자가 그 안에서 살아가며 만들어내는 에너지, 즉 ‘리듬’을 예술적으로 해석하는 전시였다. 이번 전시를 준비하며 도시의 어떤 부분을 탐구했는지, 또 그 과정에서 특별히 발견한 도시의 리듬이나 구조가 있는지 궁금하다.

박: 도시에 놓인 사물과 사물간의 거리, 높이, 크기, 형태에서 리듬과 모듈을 찾아내고자 했다. 그리고 좀 더 확장된 사물인 건축물, 설비구조, 도로의 형태와 크기를 가늠하고 연구하는 자세로 본 작업에 임했다. 도시의 기획 단계에서부터 세워진 건물과, 그 사이에 끼워 맞춘 듯 지어진 가건물, 그리고 발전과 재개발의 분위기에 힘입어 새롭게 지어진 콘크리트 질감의 공장, 가게, 아파트들 간의 촉각적 감각을 사물의 사후세계라는 세계관으로 무한의 디지털 가상영역에서 자유롭게 풀어냈다.

Q. 공공의 영역에서 미술이 작동하는 방식에 대해 연구하는 동시에, 일반적으로 ‘공공조각’, ‘공공설치물’ 하면 떠오르는 고정불변의 성질이 아닌, 가변적이고 생동하는 사물의 성질을 녹여내는 작업을 하고 있다. <두 비트 사이의 틈>에서 선보인 ‘토프 투 오렌지’(2022)에서도 이러한 사물의 생동감과 운동감을 느낄 수 있었는데, 이처럼 공공의 영역에서 사물의 삶을 구현할 때 특별히 염두에 두는 부분이라거나 목표하는 지점이 있는가?

박: 동시대의 공공영역은 물리적 공간만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오히려 디지털 공간이 야말로 우리가 대단위의 공시성을 실존하는 광장이자 공공영역이다. 이러한 영역의 변이와 확장을, 사물의 물리적, 의미적, 역사적, 사회적 죽음이라는 스토리의 계기를 바탕으로 가상공간을 건설하고 사물에 새로운 생동감을 삽입하고자 했다. ‘사물의 죽음 이후 생겨난 사후세계’라는 설정을 통해 물리적, 경제적, 사회적 제한이 없는 구역과 사물을 건설하고 공유하고자 했다. 그 안에서 사물과 건축, 지형은 물성이라는 한계를 탈피하고 판타지적 세계관에서 새로 태어나 데이터로써 자유를 획득한다

Q. 최근에는 사물의 정치적, 의미론적인 죽음 이후의 생동과 사후세계의 구현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알고 있다. ‘보겐라움 에피소드’ 등의 작업이 현실에서 사물의 장례식을 치르는 행위였다면(파괴), 이후의 작업들은 장례식이 거행된 후 가상의 사후세계로 옮겨진 사물들이 존재방식(재생)을 보여주는 것 같다고 느꼈다. 이처럼 사물의 사후세계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 및 공공영역을 현실에서 가상의 세계로 이동시키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박: 앞서 설명했듯이, 공공영역의 의미가 물리적 광장에서 디지털 가상영역으로 확장되었기 때문이다. 2018년 기준으로 그 전에는 주로 사물의 생동에 대한 퍼포먼스를 주로 했었는데, 그 과정에서 중요한 지점은 그 퍼포먼스가 발생하는 지역과 장소성이었다. 지역적 맥락과 특정 공간에서 발생하는 우연성에 기대어 사물의 생동을 극대화하고 에너지를 물리적으로 폭발시키고자 했다. 폭발적인 굉음과 함께 파괴적인 동시에 생동감이 생성되었다. 그러한 장소성이 디지털 영역으로 확장되면서, 장소적 한계가 사라지고 지형자체를 개발하고 건설하고자 건축가와 협업을 진행하게 되었다. 지금은 제2의 삶, 즉 사후세계 자체를 지형부터 작은 사물의 픽셀 하나까지 디자인하고 있다. 좀 더 신중하고 건설적인 판타지를 그리고 있는데, 무한에서 오는 막막함 또한 느끼고 있다.

Q. 실재 영역에서 사물의 운동성을 표현할 때 파열음, 또는 충돌하는 듯한 사운드가 등장했다면, 가상세계에서 들리는 사운드는 굉장히 평화롭고 환상적인 느낌을 자아낸다. 가상세계의 구현에 있어 사운드 역시 중요한 축을 담당하고 있을 것 같은데, 사운드 제작은 어떤 식으로 진행이 되는지, 어디에 중점을 두고 제작하는지 궁금하다.

박: 사운드 제작은 주로 음원사이트에서 무작정 듣고 찾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플레이리스트에 사용하고 싶은 음원을 저장해 두었다가, 작업에 사용하게 되면 저작자에 연락하고 허락을 구하고 사용한다.

Q. 개인적으로 주목했던 지점 중 하나는 작품의 제목이다. ‘토프 투 오렌지’(2022)라는 제목이 토프의 흙먼지 색깔에서 생기를 상징하는 오렌지 컬러로 옮겨가는 방향성을 상징했다고 언급했던 것이 기억난다. 다른 작업들도 ‘레드 투 그레이’ ‘핑크 투 브라운’등 색의 변화를 나타내는 것들이 많다. 이 작업들이 지니고 있는 공통점이 있는가? 또 작업 제목을 색으로 표현하는 이유도 궁금하다.

박: 사물이 어떤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가는 방향성, 운동성을 제목에서 드러내고자 ‘to’ 전치사를 사용했다. 컬러는 이전과 이후의 상태를 보다 촉각적이면서 상징적으로 강조하기 위해 선택했다. ‘토프 투 오렌지’라는 제목은 토프(taupe, 회갈색)의 흙먼지 컬러에서 생기와 안전을 상징하는 오렌지 컬러의 옮겨가는 방향성을 암시한다. 상식이라는 짐을 놓고 얻게 된 자유와 즐거움을 유쾌한 판타지로 담아내고자 했다.

Q. 3D 모델링 기법으로 표현된 가상세계에는 주변 작가들에 의해 그동안 실제로 구현되었었던 작품들이 들어가 있다. 이들이 영속적으로 보존된다는 점에서 이 사후세계는 일종의 아카이브 역할을 하기도 한다. 한편, 작품은 그것이 본래 지니던 물성과 장소특정성이 제거된다는 점에서 기존과는 다른 새로운 정체성을 덧입는다. 이처럼 가상의 생태계에 적합한 정체성을 부여하기 위해 진행되는 ‘검역’의 과정에 대해 더 들어보고 싶다.

박: 가상세계로 가기 위해 거치는 검역의 과정은 작가의 미감에 기반한 것으로, 여기서 사후세계의 스타일과 무드가 디자인된다. 물리적 사물은 비물질의 가상세계/사후세계로 가기 위해 그 고유의 물성을 버려야한다. 검역의 과정을 통해 어떤 정보는 현세에 잔재하여 변형되거나 죽음을 맞이하고, 어떤 정보는 단지 휘발되어 버리며, 어떤 정보는 선별되어 사후세계까지 살아남아 부각되고 강조된다. 선별된 정보와 새롭게 붙여진 데이터는 가상세계의 생태계에 적합한 새로운 정체성을 얻게 된다.

Q. ‘토프 투 오렌지’(2022)는 금천예술공장 전시장을 그대로 가상영역에 설치한 작업이다. 작업을 진행하면서 느꼈던 금천예술공장만의 건축적 특징이 있는가? 그렇다면 이를 어떠한 해석으로 풀어냈는지 궁금하다.

박: 우선은 독산역부터 금천예술공장에서 작업에 설치된 지점까지 걸어가는 경로로 구역을 좁혀 작업했다. 이러한 한정된 구간을 설정한 이유는 애초에 기획된 가상공간에서 구현될 공간의 변형성을 극대화하고, 이를 카메라 워킹을 통해 밀도 깊게 조망하기 위해서다. 한정된 구간에서 발견되는 사물, 건축, 도로, 지형은 그 안에서 나름의 리듬과 공존을 이루고 있다. 평범한 길가에 놓인 사물은 상식적인 모습으로 화석처럼 뽀얀 흙먼지 속에 묻혀 있다. 작업은 이 사물들의 의미론적 죽음을 상정하며, 나는 사후세계설계를 통해 이들에게 새로운 정체성을 부여했다. 또한 공장의 흔적과 물건, 공사가 진행 중인 금천구(특히 독산역에서 금천예술공장으로 가는 골목길)에 놓인 사물들을 3D로 캡쳐하여 가상영역/사후세계로 옮겨 설치했다. 물리적 사물이 차원을 이동하면서 검역을 과정을 거쳐 정보가 변이, 확장, 변질되는데, 이 과정을 건축과 모션그래픽, 디지털 드로잉 등의 방식으로 구현한 것이다. 이번 작업은 건축가 정준우와의 협업으로 만들어졌다. 실제 전시가 이루어지는 금천예술공장 전시장을 그대로 가상영역에 삽입하여, 실재와 가상의 중간지점의 감각을 유도했다. 또한 전시장 영역을 기준으로 금천구의 골목, 그리고 가상의 건축물을 뒤섞어 영역의 혼재와 세계가 엉킨 레이어를 건축적 해석으로 풀어내고자 했다.

Q. 마지막으로, 운영 중인 가상건축 스튜디오인 <보비스투스튜디오>(이하 <보비스투>)에 대해 설명해 달라.

박: <보비스투>는 미술보다는 건축에 집중한 프로젝트 스튜디오로 정준우 건축가와 협업하고 있는 스튜디오이다. 베를린과 서울을 중심으로 가상공간과 건축을 미디어아트의 어법으로 해석하는 작업을 해오고 있다. ‘보비스투’(Wo bist du?)는 ‘너는 어디쯤이니?’라는 의문사가 들어간 독일어로, 영어로 번역하면 ‘Where are you?’에 가깝지만, 좀 더 관용적인 의미의 타자의 위치, 지위, 상태를 묻는 의미를 지닌다. 이 관용적 의문사를 사용하여,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동시대에 나와 타자의 위치를 탐색하고, 나아가서는 미래적 위치, 즉, 가상영역에서의 위치와 자리에 대해 질문한다. 우리가 다달이 받는 월급으로는 내 집 마련의 길은 도저히 불가능해보이고, 높은 대출을 끼고 내가 존재하는 이 울타리는 너무나 불안하다. 젊음을 무기삼아 이것저것 다 해보지만, 결국 내가, 그리고 내 동료가 위치하게 될 현실은 그다지 낙관적이지 않다. 그래서 일확천금을 노리며 주식과 부동산에 열을 올리지만, 그 역시 만연한 패배감에 무게를 더할 뿐이다. 그래도 우리는 우리가 존재하는 위치와 지리와 자리에 어쨌든 자족할 수밖에 없는데, <보비스투>는 이 현주소에 대한 깊은 통찰과 풍자를 담은 건축 플랫폼이다. 이는 동시대인들이 바라는 어떤 멋진 건축물이나 집에 대한 판타지를 충족시켜 줄 수 있는 작은 숨구멍이 될 수도 있겠다. <보비스투>는 문자 그대로 물리적인 나의 위치를 질문하는 동시에, 중력을 넘어 비물질의 세계에서 내가 존재하고 싶은 공간에 대해 질문하고 있다. 현재는 아르코와 국토교통부의 지원으로 젊은 국내 건축가들의 설계로 가상공간에 건물을 짓고 그것을 가상의 아이템으로 변환하여 판매, 소비하는 프로젝트를 구현해내고 있다. 관련 전시는 11월에 <보비스투> 홈페이지에서 오픈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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