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비트 사이의 틈
Between Two Beats

2022.7.21. - 8.10.
금천예술공장 3층, PS333

《두 비트 사이의 틈》: 리듬, 흐름, 기억 들을 통해 소환되는 도시(로부터)의 감각들

김민관(아트신 편집장)


“ “지중해 도시들에서는 도시적 공간 즉 공적인 공간이 그 다름들과의 모든 관계를 드러내고 펼치는 거대한 공연장 같은 것이 되는 것 같다. 이 속에서 의례, 규범, 관계 들이 가시화된다. 그것들은 상연된다.”

앙리 르페브르, 『리듬분석: 공간 시간 그리고 도시의 일상생활』, 정기헌 옮김, 갈무리, 2013, p. 242.

전시 《두 비트 사이의 틈》에서 ‘도시의 리듬’이라는 감각적 명제는 저마다 도시를 ‘측정’하는 예술가의 감각을 경유해 도시의 경험을 재구조화한다. 작품(과 작품 간) 배치는 다분히 중첩된 원환의 궤적을 이루는 가운데, 도시에 대한 감각을 수반하기 위한 파편적인 몽타주와 재현의 이미지는 전시장에서 시지각적인 지리를 구성한다. 포화된 오브제와 구조물 사이를 넘나들며 몸에 달라붙듯 전시는 현전하는 감각으로, 관람객으로 하여금 거리를 확보하기 힘든 상태에 놓이게 한다. 따라서 전시의 리듬을 분석하는 일은 이 체험의 시간을 복기하는 가운데, 전시가 도시의 리듬을 어떻게 번안하며 그것을 메타-언급할 수 있는지를 가늠해보는 일이 될 것이다.

재현의 감각

박윤주 작가의 〈토프 투 오 렌지(Taupe to Orange)〉(2022. 싱글 채널 비디오, 4K.)는 금천 지역에 대한 모델링과 그래픽 디자인을 경유한 시지각적 전환을 통해 물리적 공간에 대한 이동의 시점, 그리고 서사를 만든다. 빛과 선분에서 면과 입체로 탈바꿈되며 맞닿게 되는 색 공간들은 사실상 관람객에게 물리적으로 인계되기보다는 새로움이 그 체험의 감각을 대체하는 것과 같다. 물리적 이동 대신에 장면의 ‘우연한’ 뒤바뀜, 그것과 함께 찾아오는 신기함 또는 신비함을 주는 현란한 시각적 기술(記述)은, 금천의 풍경들을 동화적이고 환상적인 세계의 장면으로 엮는다. 여기에는 상당 부분 배경음악의 힘 역시 좌우한다. 재현적 이미지는 빛과 색, 전환의 감각 속에서 신기루와 같은 시공으로 세워지고 사라진다. 흡사 사막의 배경 위에 세워지는 심미적 형상은 재개발의 과정과 흔적 대신에, 휴양지의 나른하고 도취되는 평화로운 광경을 제시하는 것 같다.

권희수 작가의 〈하강(Nose dive)〉(2022. 단채널 영상, 반투명 스크린, 2채널 스피커.)이 지닌 시각장은 신체 전체가 함몰되는 바닷속이라는 매체의 위상 아래 있다. 하강할 수밖에 없는 수행, 무기력한 의지의 결단으로 인해 ‘전체’로부터 벗어날 수 없이 전이되는 사운드는, 나의 변화되는 몸의 질적 알레고리이면서 내가 보는 것이라 규정하는 형체의 배경이 비로소 ‘보이는’ 것이 되는 어떤 사태를 드러낸다. 프로젝트와 벽의 거리에 따른 두 대의 프로젝터를 통해, 정면과 가까운 따라서 명확한 이미지를 먼 그래서 흐릿해지는 이미지가 감싸고 있다, 또는 전자가 후자를 뚫고 나오고 있다. 여기서 흐릿하고 큰 후자의 이미지는 옆의 벽면까지를 차지하고 입구 쪽 투명막은 휘어진 채 정면의 벽면에 그림자 굴곡을 만든다. 이러한 이미지의 겹 투사는 신체를 ‘절단’하는 바다와 흡사해지는데, 우리는 마찬가지로 다른 2면을 하나의 면처럼 보거나 하나의 면만을 볼 수 있고, 모든 면을 동시에 볼 수는 없기 때문이다. 반면 그것을 보는 건 전체로서의 미디어에의 둘러싸임이다. 〈토프 투 오 렌지〉가 분명한 이미지와 함께 이동한다면, 그리고 그 이미지의 사라짐을 지켜본다면, 〈하강〉은 명확한 이미지 전체로부터 형해화되고, 마침내 그 이미지를 끊어낼 수 없게 된다.

서재정 작가의 〈불확정성 유기적 공간 13-15〉(2022. 가변 캔버스 위에 아크릴 물감, 150×125cm, 125×150cm, 150×125cm.)는 비정형의 캔버스 위에 색면 공간을 만들고 그 위에 선분을 더해 안팎으로 접힘의 분기를 달리하는 입체 공간을 구획하는, 유사한 세 개의 작업으로 구성되었다―아마도 13·14·15를 지시한다. 세 개의 면은 회색 계열의 두 면에 더해 한 면만 푸른 계열로 그 색을 달리하는데, 이는 세 면의 두 모서리를 포함하며 중앙으로 뻗어나간 세 선분의 확연한 구분과 함께 입체 구조의 단면을 떠올리게 한다. 여기에 색면을 포함하지 않는 선분들의 꼭짓점을 잇는 선분이 이를 하나의 입체로 구속한다. 좌측 두 점과 달리 우측의 회화는 이 얇은 선분이 모이는 꼭짓점이 짙은 색면 위에 맺힘으로써 이 선분의 가상성을 약화하는 차원이 크다. 결과적으로 〈불확정성 유기적 공간 13-15〉는 평면에서 큐브의 입체 구도를 만드는 가장 기본적인 작화 방식에서 유래한다는 점에서, 그리하여 보는 이의 시각장의 구조로 수렴한다는 점에서 재현 질서 과정의 시간 축을 생성한다.

이현우 작가의 작업은 도시의 반복된 또는 패턴화된 무늬를 발견해 이를 그리는데, 여기서 정돈된 양상과는 달리 콘크리트 바닥이나 보도블록같이 우리와 접촉면이 생기는 도시의 표면적―건물 역시 바람이나 비와 같은 침범의 영역이 된다는 점에서 마찬가지이다.―은 절대 매끈하지 않은 표면임이 드러난다. 이는 일종의 긁어놓은 표면이 되는데, 특히 보도블록의 좌우로 나뉘는 또는 좌우로 교차하는 ‘긁힘’의 양상(〈blue〉, 2022. 162×130cm, 캔버스에 오일.)은 가까이에서 보면 꽤 두드러지게 다가온다. 시지각적 디자인의 영역은 사실 시간의 지층이라는 코드를 함축하는 셈이다. 이현우의 작업은 디자인적 원형으로 환원되는 도시의 기호들이 현실의 노화된 흔적을 품고 있음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서재정의 공간과는 차이가 있다. 반면 기울기를 입힌 직접적인 도시 표면적과의 조우는 결과적으로 시지각적 질서에 대한 물음을 추동한다는 점에서, 부상하며 생성하는 ‘원형’으로서의 공간에 대응한다.

참여의 매체

노세환 작가의 〈저울은 금과 납을 구분하지 않는다.〉(2019. 아크릴 판재, 무쇠봉, 와이어선, 가변설치.)와 이재욱 작가의 〈도로의 리듬〉(2022. 바닥 테이프 설치 및 AR, 6m×6m.)은 각각 종과 횡의 방향으로 배열된다. 하나의 작업인 듯 분별되지 않는 동시에 착시를 유도하는 듯한 작업의 특성은, 두 작업이 횡의 위상차로 종합된다는 점에서 기인한다. 〈도로의 리듬〉은 도로의 규제 기호로서 작용하는 도로 차선과 안전 고깔 들이 자리한 재현적 이미지의 장으로, 태블릿을 들고 증강현실에서 생겨나는 숫자와 사물 들을 따라가며 도로 교통의 원칙을 수행하는 교육적 장으로 연장된다는 점에서 ‘체현되는 도식’으로 자리한다.
〈저울은 금과 납을 구분하지 않는다.〉는 그 위에 달린 색색의 모빌들로, 〈도로의 리듬〉에서 발밑의 기호들이 갖는 정보를 해독하는 과정에서, ‘실재’의 장애물로 기능한다. 그것은 멀리서 보면 〈도로의 리듬〉의 수직으로 솟은 안전 고깔들에 대응하며 공간의 총체를 구성하지만, 실제 AR을 따라갈 때는 과잉된 정보로서 시각 바깥에서 침입한다. 모빌은 유동적인 것이지만, 바닥에 붙어 있는 테이프로서의 차선처럼 흔들리지 않는 편이 낫다. 하지만 이는 그것의 흔들림 여부와는 상관없이 이동하는 신체에는 혼동을 유도한다. 그렇다면 〈저울은 금과 납을 구분하지 않는다.〉는 물리적으로 ‘과잉된’ 것, 또는 혼재되어 독자적인 위상이 감추어지는 것으로 이야기할 수 있지 않을까.
모빌은 어떤 바닥 위에 드리워진다. 그 ‘어떤’이 특정한 것일 때 문제가 되는 것일까. 이 작업이 작가가 지닌 평소의 문제의식처럼 ‘시스템상의 균형’을 이야기하려는 것이라면, 이 시스템의 입체적인 요철을 형성하는 한편 도로 시스템 위의 이미지들은 바닥의 하나의 배경 이미지로 접힌다는 점에서 작품은 그에 기생하며 그와 공명한다. 제목에 관한 즉자적인 해석은 색색의 실재 모빌의 부피와 크기, 재질은 같지만 단지 다른 위치에서는 다른 높낮이를 가지고 있어 차이를 생성한다는 점과 맞물린다. 이에 따르면 질적으로 같으나 위상차가 다른 사물들의 가치적인 차이는 단지 특정 시점에 의거한 것임을 의미한다.
〈도로의 리듬〉은 훈육의 관점에서 도로의 축소판에서 그 규칙들을 수행하며 〈토프 투 오 렌지〉와 같이 도시에 대한 감각을 불러온다. 도로의 선분과 규칙은 격자 구조 안에서 어떤 혼란을 질서화하고 잠재우는데, 그 흐름의 어지러운 세계의 이미지를 복잡하지만 인상적이지 않은 수열로 맞바꾼다. 〈도로의 리듬〉은 AR 영상 화면에서 차와 함께 허공을 나는 시조새 같은 조금 거대한 새를 병치하는데, 이는 차와 마찬가지로 외곽선을 딴 흔적처럼 실물에서 멀어지며 상상계적 이미지로 제시된다. 관객의 몸은 화면 바깥에서 화면에 들어오지 못한 채 화면과의 동기화를 추구하는 ‘유령’과도 같다는 점에서 뒤집힌 이미지로 이에 대응한다.

안광휘 작가의 〈렌티큘러〉(2022. 2채널 영상 및 사운드 프로젝션, 가변크기.)는 광장의 인터랙티브한 설계 모형으로 제시되며, 시청각적 중첩과 변형 전략을 통해 내용과 메시지를 의도적으로 감축하여 작품에 접하는 관람객의 신체가 커뮤니케이션 모델의 실패를 완성하는 역할을 추동하는 작업이다. 이는 기본적으로 두 개의 음악이 공진하며 그에 대한 두 음악의 대사가 겹쳐서 흘러감에도 그 음악을 듣고 보기 위해 그 안에 머무르는 순간 다리쯤의 위치에 속하는 자막이 비로소 보이고 미묘하게 조금 더 들리기 시작하며 무언가 분명해질 것처럼 보인다는 점에서는 예외적으로 보인다. 반면, 분홍색과 초록색 계열의 색상을 투사하는 프로젝터 중 하나의 빛이 신체에 닿는 순간, 다른 하나의 색이 온전히 보이게 되는 것에 더해 사운드 역시 조종되지만, 자막 한 줄이 사라지는 속도는 신체 이동을 통한 드러내기의 방식을 상회하며 또 다른 프로젝터의 색 공간에 포함된다는 점―다른 색 공간의 자막이 보이기 시작한다.―에서 그것의 실패는 필연적이다.

〈렌티큘러〉는 전시에서 더 집중하면 ‘잘’ 들을 수 있는 작업으로 존재하기보다 불포화되는 글자와 사운드의 향연이 어떻게 소통의 결락을 이루는지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역설적으로 전시장 어디서든 포화되는 작업으로 존재한다. 그것은 어떤 흐릿한 일부만을 가시화한다. 현란한 ‘지시’를 무(력)화하는 작품의 ‘형식’은 예술가에 대한 “냉소적인 태도”와 “자기 연민”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예술가의 자기 분열상을 지시한다. 동시에 관람객의 실패 자체를 즐기기 그리고 예술가의 실패 자체를 고도화하기가 만나는 지점에서 비로소 예술의 형상 역시 분명해진다.

확장적 입체

윤주희 작가의 〈긴 하루를 사는 이들을 위한 기념비〉(2022. 나무, 복합설치, 가변크기.)는 새벽, 네 시에 하루가 시작되는 이들을 호명하며 진정성의 문학적 언설을 구성한다. 그것은 상대를 가정한 가상의 화자가 쓴 편지 형식에 가깝다. 한편 이를 감싸는 시지각적 형식은 작가의 신체 부분을 본떠 만든, 클라이밍 홀드가 붙어 있는 액자와 구조물이다. 동시에 거기 쓰인 직접 쓴 작가의 필체이다.
지지체로서의 홀드는 반짝이는 색색의 결정체로 접촉에 대한 유인이지만, 필체는 그것과의 거리를 산출한다. 곧 접촉은 언어로 변환된다. 여기서 격렬한 클라이밍을 하는 것과 고단한 육체노동을 하는 것은 환유적인 이미지 차원으로 교환되기보다는 고통을 통한 익숙해짐이라는 아이러니한 삶의 반경과 같은 알레고리를 통해 통합된다.
신체의 형상이 클라이밍과 연관된다면 노동의 형상은 모호하다. 이러한 불완전할 수밖에 없는 ‘통합’에서 “새벽 네 시”라는 시간이 그 노동을 정의한다. 결과적으로 〈토프 투 오 렌지〉가 현실을 탈현실의 유토피아로 바꿈으로써 노동 바깥에 대한 환상을 추동하며 도시를 전유한다면, 〈긴 하루를 사는 이들을 위한 기념비〉는 잉여의 시간과 맞바꾸는 노동자의 삶에 대한 애도와 이를 미묘한 시간-지층의 변경에 따른 현상학적 체험으로서의 낭만과 뒤섞는 가운데 도시의 이면을 재활성화한다.

조재영 작가의 〈Monster & Monsters〉(2022. 60cm×60cm×180cm, 철제, 판지, 접착지, 페인트, 거울.)는 심미적 오브제와 기괴한 아상블라주 구조물 사이에 위치한다. 배색이 된 기하학적 입방체와 미로 같은 철재, 그에 매달린 거울들, 전체적으로 그다지 안정적이지 않은 좁은 반경에 자리한 위태로운 작업의 균형은 쓰임의 활용도에 대한 물음과 함께, 이 작업에 대한 접근성을 재고하게 한다. 곧 이 작업이 어디서 시작되고 어디로 수렴되는지를 가늠하기 어렵게 만든다. “연결되어 공존”하는 작업은 선과 선을 잇는 수학적 놀음에 의한 것으로, 선분들의 복잡한 자의적인 이념형의 구조와 정위되지 않음의 세계를 구성한다. 이는 말 그대로 ‘기괴한’ 산물―“Monster”―이 된다. 이러한 조각은 도시의 안팎에 대입하면, 거리 조형물로서는 너무 현란하며 실내 장식물로서는 너무 복잡하다. 곧 과잉된 심미성은 예술의 형식이 갖는 절대적인 규칙을 외재화한 결과이며, 그로부터 관람객에게 이를 풀 복잡한 셈법을 유도한다.

〈이동불가능한 예술책상〉(2021. 50cm×80cm×100cm, 목공)은 이전에 고윤정 큐레이터가 노경택 작가에게 “이동하는 예술책상”을 의뢰한 이후, 이를 실제 자신의 주거 영역에서 이동시켜 보며 겪은 이동 불가능성의 도시 표면에 대한 경험을 본 전시에서 전유한 것이다. 여기에는 고윤정의 시간과 구조물의 사용 흔적이 담겨 있다. 앞서 도시의 표면을 이현우의 작업이 가시화했다면, 〈이동불가능한 예술책상〉은 그 반절의 무늬를 담지한다. 동시에 〈Monster & Monsters〉와 같이 공공 구조물로서의 예술의 불가능성을 상기시킨다.

진달래&박우혁의 〈Stage Direction〉(2022. 싱글 채널 비디오, 복한설치, 가변크기.)은 하나의 방 전체를 단조로운 코끼리의 걸음 영상과 바이올린/첼로/플루트의 단속적인 연주 음향, 종이로 만든 입체 도형들, 스코어 북으로 구성한 작업이다. “무대 지시서”로 번역되는 제목은 공간의 파편들에 대한 일종의 스코어 북과 같으며, 스코어 북에는 코끼리 걸음과 연주에 관한 기보가 담긴다. 이러한 스코어 북은 영상, 음향을 일련의 정보 값으로 환원한다. 이는 나아가 책 안 중간중간의 페이지가 검은 점들, 곧 비트로 수렴된다는 사실, 그것이 어떤 의미도 일으키지 않는 언어에 대한 알레고리로 제시된다는 것과 연관된다.
이 진공의 방은 어떤 정보들이 변주되고 있다는 차이를 그 안의 책을 통해 내재적으로 기입하고 있지만, 그 차이들이 어떤 언어의 맥락을 만드는 것 역시 아니라는 차원에서 바로 그와 같은 반복되는 정보 값으로서의 순일한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 숫자와 도형은 공간 바깥의 하나의 색면 안에 제시되는데, 이는 스코어 배열의 기본적인 측정 단위가 된다. 〈Stage Direction〉은 박자들을 줄 세우는 정렬의 원칙을 ‘표기’하는 것이고, 이러한 표기는 도시라는 공간에서 반복과 차이의 양상을 띤 특정 시지각적 산물이나 앰비언스 등으로 연장해볼 수 있을 것이다.

리듬-기계로서의 도시

도시를 작동시키는 도시의 바깥―〈긴 하루를 사는 이들을 위한 기념비〉―으로부터 출발한 전시는 전체적으로 도시에 위치한 나의 위치를 탐문한다. 전시는 소음과 빛, 물질 등의 중첩을 통해 전시장 자체를 ‘도시’ 일부로 편입한다. 또는 비미학적인 실재가 미학적인 지층을 산란시키고 있다고도 할 수 있겠다. 분리된 방에 자리한 〈하강〉 역시 자연이라는 구역에 맞닿은 예술가의 확장되고 굴절된 신체에 기초하지만, 도시의 질서로부터 이탈한다. 이는 나의 위치 자체를 확정할 수 없는 증폭되고 확장된 배경-실재와의 조우에 기초한다.
결과적으로 “두 비트 사이의 틈”은 도시의 틈을 제시하며, 도시의 코드와 탈코드화된 도시의 지층 사이에 위치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공교롭게도 전시는 마지막 날 권희수의 퍼포먼스 〈콘택트 콜(Contact Call)〉(2022. 입체음향 사운드, 프로젝터, 360도 회전 설치 장치, 4채널 스피커.)을 통해 닫혔는데, 파찰음 성격의 익숙한 환경 소음들이 바닷속 소리와의 미묘한 차이와 함께 그 범주를 경계 짓고 있는 가운데, 전시장 중앙쯤에서 360도 돌아가는 프로젝터의 빛-단면이 전시장 작업 전부를 하나씩 훑어 나가며, 전시를 하나의 시선과 시간으로 종합하는 한편 특정 작업들을 비로소 보이게 만들었다. 곧 작업이 빛-단면에 포획되는 순간 작품이 어둠 속에서 현전했다―〈저울은 금과 납을 구분하지 않는다.〉의 모빌들은 벽에 맺힌 색채 그림자와 맞물리며 입체화되었다면, 〈불확정성 유기적 공간 13-15〉는 그림 한 점 한 점이 부상하고 있었다. 빛이 극장을 짓는다면 소리는 그 극장을 공간으로 구조화했다. 〈콘택트 콜〉은 결국 관람객을 전시장 안에 침잠케 하거나 전시장 자체를 탈영토화했다고 할 것이다. 도시의 산란이라는 전시의 형상과 비로소 산란으로부터 출현하는 도시의 형상은 결국 같은 감각을 공유하고 있는 것 아닐까.

“저 아래 광장의 리듬들은 어딘지 바다 같은 느낌을 준다. 흐름들이 대중들을 통과해 지나간다. 광장은 새로운 관중들을 데려 왔다가 다시 데려가곤 하는 흐름들과 분리된다. 어떤 이들은 자신들을 삼켰다가 금세 토해 낼 괴물의 아가리 속을 향해 간다. 파도가 거대한 광장을 덮쳤다가 물러난다. 밀물과 썰물의 반복이다.”

Ibid., p. 125.

전시를 완성하는 건 물론 관람객일 것이다. 그로부터 비트와 비트 사이에서 틈이 발생한다. 생명체의 동선은 전시의 리듬을 현전시킨다. 《두 비트 사이의 틈》은 그 관람객의 몸이 포함되는 형식에 대한 고민이기도 하다. 외부를 온전히 함입하려거나(〈하강〉) 단속적으로 불포화되는 경계 자체에 위치하거나(〈렌티큘러〉) 촉지적이거나(〈긴 하루를 사는 이들을 위한 기념비〉) 시지각적인 장을 산출하는(〈불확정성 유기적 공간 13-15〉) 가운데 도시의 이미지를 소환한다. 곧 도시는 하나의 거대한 리듬 기계이다. 그 안에서 공명하는 건 “흐름들”을 경유하며 사라지는 관중이다. 전시의 마지막―〈콘택트 콜〉―은 그 과정에서 흐르는 시간의 단면을 드러낸다, “광장의 리듬들”을 통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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